주식 이야기를 하다 말고 웬 학교 이야기냐고요? 사실 오늘 소개할 이야기의 본질은 ‘투자’입니다. 다만 그 대상이 주식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사람’이었을 뿐이죠.
지금으로부터 100년, 140년 전, 이 땅의 선교사와 자본가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거액을 들여 학교를 세웠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규모 벤처 투자에 가까운 결단이었는데요.
그 결과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학교들입니다. 어떤 학교가 있고, 누가 그 문을 나섰는지, 그리고 그 뒤에 숨은 ‘투자’의 맥락까지 오늘 주식이야기에서 풀어보겠습니다.

1.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학교 TOP 10
| 순위 | 학교명 | 설립연도 | 설립 배경 |
|---|---|---|---|
| 1(공동) | 배재고등학교 | 1885 |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 |
| 1(공동) | 경신고등학교 | 1885 |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연세대 설립자)가 세운 언더우드학당이 모체 |
| 3 | 이화여자고등학교 | 1886 | 선교사 스크랜턴이 세운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
| 4 | 광성고등학교 | 1894 | 선교사 윌리엄 홀이 평양에서 설립, 전국에서 6번째로 개교 |
| 5 | 숭실고등학교 | 1897 | 선교사 베어드가 평양에 세운 숭실학당이 모체 |
| 6 | 보성고등학교 | 1906 | 민족 자본가 이용익이 설립한 사립학교 |
| 6 | 휘문고등학교 | 1906 | 민영휘가 세운 광성의숙을 고종이 ‘휘문의숙’으로 개칭 |
| 6 | 숙명여자고등학교 | 1906 | 황실의 지원으로 세워진 여성 교육기관 |
| 6 | 진명여자고등학교 | 1906 | 순헌황귀비 엄씨의 후원으로 설립 |
| 10 | 정신여자고등학교 | 1880년대 후반 | 선교사 애니 엘러스가 세운 연동여학교가 모체 |
(※ 설립연도는 초기 사숙·학당 시절과 정식 인가 시점 중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자료마다 1~2년씩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2. 왜 하필 1885년과 1906년에 몰려 있을까
표를 자세히 보면 신기한 패턴이 하나 보입니다. 설립연도가 1885년과 1906년, 두 시점에 유독 몰려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엔 각각 다른 ‘투자자’의 사연이 있습니다.
1885년은 조선이 서양 선교사들에게 정식으로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시점입니다. 이때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은 종교 전파와 함께 ‘근대 교육’을 조선에 이식하는 걸 일종의 장기 프로젝트로 삼았습니다. 배재고, 경신고, 이화여고, 광성고, 숭실고 모두 이 시기 선교사들의 사재와 선교 자금이 투입된 결과물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외국 자본이 한국의 인적자원에 초기 투자를 한 셈이죠.

반면 1906년은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직후, “나라를 되찾으려면 결국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애국계몽운동, 이른바 ‘교육구국운동’이 들불처럼 번진 시기였습니다. 이 흐름 속에서 이용익, 민영휘 같은 당대의 자본가와 정치인들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웠고, 황실도 직접 후원에 나섰습니다. 국권을 잃어가는 위기 속에서, 다음 세대에 미래를 걸겠다는 결단이 한 해에 여러 학교의 개교로 이어진 셈입니다.
결국 이 두 시기 모두, 지금 눈으로 보면 ‘인적자본(human capital)’에 대한 투자였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수익이 나는 사업이 아니라, 수십 년 뒤에야 결실을 보는 장기 투자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벤처캐피탈이나 국가 R&D 투자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3. 이 학교들이 배출한 이름들
이렇게 세워진 학교들은 이후 정말 다양한 인물을 배출했습니다. 배재고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졸업한 곳으로 유명하고, 경신고는 독립운동가 안창호와 김규식을 비롯해 축구 감독 차범근, 박항서, 유상철 같은 스포츠 스타들의 모교이기도 합니다. 이화여고는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라는 상징성 덕분에, 근현대 여성 지도자와 예술가를 다수 배출한 학교로 꼽힙니다.

특히 흥미로운 건 보성고와 휘문고입니다. 두 학교 모두 재계 인사들을 다수 배출한 학교로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는데, 애초에 이 학교들을 세운 이용익과 민영휘 자신이 당대의 손꼽히는 자본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본가가 세운 학교가 다시 자본가를 길러낸다’는 흥미로운 순환 구조가 읽히기도 합니다.
4.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교육에 대한 투자’
이 오래된 사학들의 이야기는 사실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사립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들은 재단 전입금이나 기부금을 통해 학교를 지원하고, 이런 기부금에 대해서는 세제 혜택이 주어집니다. 부유한 개인이나 기업이 재단에 자산을 출연하는 방식은 140년 전 선교사와 자본가들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웠던 방식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는 ‘나라를 살리기 위한 교육’이었다면, 지금은 ‘사회 환원’이나 ‘상속·증여 전략’의 성격이 더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결국 오늘 소개해 드린 이 오래된 교문들은, 100여 년 전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먼 미래에 돈과 시간을 걸었던 흔적입니다. 당장의 수익률로는 도저히 계산이 안 되는 이 ‘사람에 대한 투자’가, 지금 우리가 아는 여러 유명 인사와 사회 지도자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참 흥미롭지 않나요?
이 글은 각 학교의 공식 연혁 및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설립연도와 순위는 참고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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